원작은 막장 극우 만화, 하지만 영화는?

일본의 대체역사물 장르 중에 ‘가공전기(架空戦記)’라는게 있다.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만약에 역사적 사실이 다르게 진행되었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지는 소설이나 만화, 애니, 드라마 등을 가리키는 장르, 그 중에서도 전쟁을 다루는 장르를 말한다.

이렇게만 설명한다면 크게 문제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What If’라는 가정은 비단 대체역사물 뿐만 아니라 판타지, SF 장르에서는 사실 흔해 빠진 설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상당히 불편하고 불량한 형태로 소화되는 경우가 많고, 오늘 소개할 작품도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대체역사물 장르는 창작물의 영역에서는 사실 꽤나 흔한 접근 방식 중에 하나이며, 이미 일어난 과거의 역사에 ‘만약에 이랬다면?’이라는 가정을 둠으로써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역사적 사실을 손쉽게 왜곡’할 수 있는, 일종의 변명 또는 자기위안의 수단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천재 수학자가 대전기 일본을 승리로 이끈다는 극우 막장 만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 
천재 수학자가 대전기 일본을 승리로 이끈다는 극우 막장 만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 

특히나 일본의 경우, 태평양전쟁 당시의 사건들을 왜곡함으로써, 정신승리를 하거나 역사적인 교훈을 외면하려는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편이다. 물론, 일본이라고 해서 ‘가공전기’물이 모두 역사적 왜곡을 통한 우익들의 정신승리, 혹은 극우적인 개념을 피로하는 작품들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많은 건 사실이고, 특히 이 시기에 주권침탈과 식민지배를 당한 당사자인 우리들에게는 더더욱 경계해야 할 장르이기도 하다. 비슷한 장르로는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물로, 전쟁물 덕후들에게 인기가 높은 ‘Luft 46’ 같은 것도 있다. 이 쪽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패망하지 않았고 1946년에도 유럽에서 활발한 전과를 올렸다는 설정으로, 2차대전 당시 나치스 독일이 계획했던 전투기들이 연합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과정을 일러스트로 표현하는 장르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작품은 그 결이 조금 다르다. 극우적 사상을 토대로 정신승리와 역사왜곡의 극치를 달리는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오히려 원작의 내용을 계승하거나 지지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비판하고 역사에 대한 반성을 담은 영화다. 바로 2019년 7월에 개봉을 한 ‘아르키메데스의 대전(アルキメデスの大戦)’이다.

원작은 막장 그 자체지만 원작에서 제목과 일부 에피소드만 차용했을 뿐 원작과는 전혀 다른 '반전주의 영화'가 되어버린 '아르키메데스의 대전(2019).' 
원작은 막장 그 자체지만 원작에서 제목과 일부 에피소드만 차용했을 뿐 원작과는 전혀 다른 '반전주의 영화'가 되어버린 '아르키메데스의 대전(2019).' 

원작 만화는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던 입시 만화, ‘최강입시전설 꼴찌, 동경대 가다! (일본어 원 제목은 드래곤 사쿠라)’를 집필한 미타 노리후사(三田紀房)가 2015년부터 연재 중인 작품으로, 현재는 ‘감벽의 함대(紺碧の艦隊)’, ‘침묵의 함대(沈黙の艦隊)’와 더불어 일본의 3대 극우 가공전기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우리에겐 민감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으로 가득 찬 쓰레기 작품이다. 

솔직히 ‘작품’이라고 불러줘야 할 지도 모르겠을 정도. 원작 만화는 중국을 침략하여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당하자 국제연명을 탈퇴한 일본이 천재 수학자인 주인공을 해군에 임관시켜 그의 천재적인 계산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을 능가하는 기술력과 압도적인 무기들을 개발하여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아가 2차대전의 승전국이 된다는 상당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본 극우사장의 끝판왕 격을 달리는 게 주된 내용이다. 

'아르키메데스의 대전(2019).' 
'아르키메데스의 대전(2019).' 

주인공, ‘카이 타다시(櫂 直)’는 불미스러운 누명을 쓰고 동경대를 중퇴한 후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준비하던 중, 일본 해군에 합류하게 된 인물로, 천재적인 수학 능력과 일본의 상황과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을 지닌 소유자로 시대를 초월하는 신무기와 엔진 등을 개발하며 태평양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끌어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당연히 이 작품에는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나 침략 전쟁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존재하지 않고, 당연히 식민수탈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롯이 일본은 천재 수학자의 영입을 통해 승리자가 되었고 ‘원래 일본은 이랬어야 한다’는 극우적 사상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 만화에서는 초반부에 주인공이 얼마나 천재적인 수학자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스치고 지나가는 에피소드를 내용의 중심으로 잡고, 그것을 극대화시켜 당시 일본이 얼마나 막장스러운 국가였고, 그 막장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에 대한 포커스를 원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구성했다. 가장 쓰레기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되려 상당히 공감을 보낼 수 있는 수작(秀作)으로 만든 셈. 

'아르키메데스의 대전(2019).' 
'아르키메데스의 대전(2019).' 

영화는 워싱턴 조약을 파기하고 국제 연명으로부터 탈퇴한 일본이 노후화된 공고(金剛)급 전함을 대체할 신형 전함을 건조하고자 하는 해군 일파와, 항공모함을 도입해야 한다는 일파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시작을 한다.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 항공모함을 더 많이 도입해야 한다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중장은 거대 전함을 도입해야 한다는 ‘히라야마 타다미치(平山忠道)’ 중장의 주장에서 건조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은 점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이 건조 가격을 책정한 계산식을 알아내기 위해 우연히 술집에서 알게 된 청년 수학자, ‘카이 타다시’를 설득하여 해군 소령으로 임관시킨 후, 뒷조사를 시킨다.

'아르키메데스의 대전(2019).' 
'아르키메데스의 대전(2019).' 

거대 전함 건조파의 방해 공작과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면서도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단지 예산 책정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거대 전함의 설계 그 자체에도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밝혀내고, 그래서 거대 전함의 건조 계획 자체가 취소되는 것처럼 끝날 듯 했으나, 주인공은 ‘거대 전함을 건조하는 ‘히라야마 중장의 숨은 목적’을 알게 되고 경악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 전함’은 야마토(大和)급 전함의 1번함이었던 야마토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탈퇴하고 국제 연명에서도 탈퇴한 일본이 해상에서 함대 간 결전을 치룰 시 해군의 전력 열세를 극복하고자 계획하면서 건조된 전함이자, 당시 일본의 국력을 상징하기 위한 전함이었다. 동시에 2차대전 당시 건조된 전함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함으로, 460mm의 3연장 함포를 무려 3기나 탑재하고 전장 263미터에 전폭이 무려 39미터에 달하는 초 거대 전함이었다. 

일본 쿠레시 해사역사박물관(呉市海事歴史科学館)내에 전시되어 있는 야마토 모형. 1/10 스케일임에도 어마무시한 크기다. 이미지 출처:大和ミュージアム
일본 쿠레시 해사역사박물관(呉市海事歴史科学館)내에 전시되어 있는 야마토 모형. 1/10 스케일임에도 어마무시한 크기다. 이미지 출처:大和ミュージアム

배수량은 무려 6만8천200톤. 승조원은 무려 2800명에 달했다. 이 전함의 크기가 얼마나 대단한 지 감이 잘 안 오시는 독자 분들을 위해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현재 대한민국 해군에서 가장 큰 크기의 전투함인 세종대왕함의 길이가 165미터에 배수량은 7200톤에 불과하다. 건물로 따지자면 여의도에 있는 63빌딩의 높이가 249미터이니, 63빌딩보다 더 큰 배가 바다 위에 떠있다고 상상을 해보시면 간단한, 그런 말도 안되는 크기였다고 보시면 된다. 

배수량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배수량(排水量/displacement)은 배가 밀어낸 물의 양을 뜻하는 용어로, 물체가 밀어낸 물의 무게는 물체에 작용하는 부력(물에 뜨는 힘)과 같으므로 배수량은 배 자체의 무게와 같다. 이게 무려 6만8천200톤이니, 정말 어마무시하게 큰 전함이었던 셈.

일본 쿠레시 해사역사박물관(呉市海事歴史科学館)내에 전시되어 있는 야마토는 2차대전과 태평양전쟁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다. 이미지 출처:大和ミュージアム
일본 쿠레시 해사역사박물관(呉市海事歴史科学館)내에 전시되어 있는 야마토는 2차대전과 태평양전쟁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다. 이미지 출처:大和ミュージアム

야마토급 전함은 총 8척이 계획되었지만 실제로 건조가 이루어져 전쟁에서도 사용된 건 1번함 야마토와 2번함 ‘무사시(武蔵)’의 2척뿐이다. 3번함 ‘시나노(信濃)’는 전함이 아니라 항공모함으로 건조되는 도중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 해군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였고, 나머지 계획된 함선들은 계획 단계에서 폐기되었다. 무사시와 더불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기함으로 군림했지만, 의외로 전과는 많이 올리지 못했고, 그나마 레이테 해전에서 나름 활약을 하다가 1944년 10월 24일에 발발한 시부얀 해전에서 침몰한 무사시와 달리, 야마토는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주로 항구에 정박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해군수병들은 ‘야마토 호텔’이라 부르거나 혹은 ‘세상에서 가장 쓸데 없는 세 가지 거대 건조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그리고 일본의 야마토 전함’이라 비아냥대기도 했을 정도로, 그 위용에 걸맞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야마토는 일본이 패전하는게 확실히 되어버린 1945년 4월 초에 이르러, 일본 해군 최후의 작전이었던 천호작전(千号作戦), 혹은 키쿠스이(菊水)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오키나와로 이동하던 도중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침몰하고 만다. 이 작전은 더 이상 해상에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게 되 일본이 ‘쓸모 없이 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야마토를 오키나와로 옮겨 일종의 고정 요새 역할을 수행하게끔 함으로써 어떻게든 연합군의 일본 본토 침공을 막아보겠다는 작전으로, 말 그래도 ‘가서 싸우되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일본 특유의 자살 공격이었다.

구 일본 해군 연합함대 최후의 해상작전이었던 천호작전(千号作戦)을 수행하기 위해 출항하기 직전에 촬영된 야마토. 일본은 야마토를 오키나와 해안에서 연합군의 대공세를 막아보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이 작전은 이미 연합군의 정보망에 들킨 상태였으며, 출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의 공습을 받아 침몰했다.
구 일본 해군 연합함대 최후의 해상작전이었던 천호작전(千号作戦)을 수행하기 위해 출항하기 직전에 촬영된 야마토. 일본은 야마토를 오키나와 해안에서 연합군의 대공세를 막아보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이 작전은 이미 연합군의 정보망에 들킨 상태였으며, 출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의 공습을 받아 침몰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미 연합군 수뇌부의 정보 활동에 의해 노출이 된 상태였고, 미 해군은 야마토가 오키나와에 도착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한다. 그리고 1945년 4월 7일, 야마토는 보노미사키(坊ノ岬)에서 미 해군에 포위되어 처절하게 두들겨 맞다가 침몰하고 만다. 1년 전, 나름 통제된 상황에서 수병들이 탈출할 수 있었던 동급 함 무사시와 달리, 야마토의 경우 침몰 전에 통신 장비들이 모두 파괴되어 버린 탓에 3천명에 가까운 승조원 전원이 몰살당했다.

영화 초반부에 야마토가 침몰한 보노미사키 해전(坊ノ岬沖海戦)의 전투 씬이 등장하는데, 정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다가 침몰하는 과정을 말 그대로 가감없이, 처절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 장면은 그 어떤 미화도 존재하지 않고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잔혹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인명 경시 사상이 특히나 높았던 당시 일본군 병사들이 자신들이 격추한 미군 전투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를 미 해군이 빠르게 구조하는 장면에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장면은 이 영화가 제공하는 백미이자, 이 영화의 목적 의식이 처음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조난 당해도 사령부는 구조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더더욱.

보노미사키(坊ノ岬)에서 침몰 직전 야마토에서 피어난 폭발을 촬영한 것.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지만 구 일본 해군 내에서도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심지어 당시 수병들 사이에서 '야마토 호텔'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고, 결국 허무하게 침몰하고 만다. 이미지 출처: National Museum of the US Navy
보노미사키(坊ノ岬)에서 침몰 직전 야마토에서 피어난 폭발을 촬영한 것.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지만 구 일본 해군 내에서도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심지어 당시 수병들 사이에서 '야마토 호텔'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고, 결국 허무하게 침몰하고 만다. 이미지 출처: National Museum of the US Navy

원작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야마토급 거대전함의 설계 미스를 수학 공식으로 풀어낸 후, 당시 기술력으로는 만들 수도 없었던 미래 병기들을 탑재하여 세계를 정복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지지만, 영화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주인공이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에 참여하게 된다.

거대전함 건조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난 뒤, ‘히라야마 타다미치(平山忠道)’ 중장은 주인공을 불러 '거대 전함'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안 보신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 약간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소개를 하겠다. 

영화 초반 도입부에서 야마토의 침몰과정이 꽤나 자세하게 나오는데, 확실히 요즘 일본 영화들의 CG 퀄리티는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느낌이다. 
영화 초반 도입부에서 야마토의 침몰과정이 꽤나 자세하게 나오는데, 확실히 요즘 일본 영화들의 CG 퀄리티는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느낌이다. 

"이 나라는 길을 잘못 들었다. 우린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환상을 가지게 되었고, 아시아를 침략하고 괴뢰국을 세우고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막장의 군국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이제 국력의 차이가 어마어마한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럼 우린 멸망하게 될거야. 하지만 패하더라도 피해는 최대한 줄이고 싶네.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면 지금의 일본을 상징하는 어떤 것, 사람들이 "이것이야말로 일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 상징물이 무너져서 전쟁 자체를 수행하려는 생각 자체를 버리게 만들어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될 거야. 그래서 난 이 전함의 이름을 야마토라고 지은걸세."  

함께 보면 좋은 영화로 미 해군 항공모함이 태평양전쟁 당시로 타입슬립하여 ‘역사를 왜곡할 것이냐, 아니면 원래대로의 역사를 지킬 것이냐’를 갈등하는 미국 영화, ‘파이널 카운트다운’과, ‘일본 패망 하루 전(일본의 가장 긴 하루(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도 추천 드린다. ‘일본 패망 하루 전’은 끝까지 일본 본토 항전, 1억 총옥쇄를 주장했던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를 상당히 미화 한 부분이 역겨울 수도 있지만. 
 
 뭐, 그렇다구 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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