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 소총으로는 실패했지만...한편으로는...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유럽에 새로운 정치적, 외교적 변화가 일어나고, 서유럽 국가들 및 북미 지역 국가들과 동구권 유럽 국가들 간의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는 이른바 냉전시기 초기, 오랫동안 독재 정권을 유지해온 스페인은 이웃 나라들과는 조금 다른 고민거리를 떠 안고 있었다.
스페인은 1939년에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년 12월 4일 ~ 1975년 11월 20일)가 이끄는 군부 세력이 스페인 2 공화국과 3년에 걸친 처절한 내전 끝에 승리하면서 1당 독재 정권(España Dictadura Franquista)을 성립했지만, 이 내전 과정에서 스페인의 경제가 말 그대로 나락에 떨어지게 되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이 제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동안 중립을 지키며 나름(?) 조용히 지냈다. 당초에는 공식 국호로 에스파냐 국(Estado Español)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1947년에 스페인의 왕실이었던 보르본 왕조(Casa de Borbón)을 복고하면서부터는 스페인 왕국(Reino de España)라고 국호를 바꾼다.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하며 철권 통치를 해온 프랑코 정권이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에는 다소나마 이들에 대한 탄압을 완화한다. 물론 내전기와 2차대전 당시에 비해 조금 완화되었다 정도이지 프랑코의 철권 통치가 종식된 것도 아니었고 프랑코의 40여년 가까운 집권기 동안 스페인은 나치스 독일 못지 않은 인종 말살과 시민 탄압을 자행했다. 한때 스페인에선 정치범, 예술가, 공화주의자, 여성, 유대인과 롬족(집시), 바스크와 까딸루냐 사람들을 탄압하고 학대한 강제 수용소가 무려 170군데나 있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외교적으로 적당히 친미주의와 친독주의를 오가며 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게 냉전이 시작되면서부터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체제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스페인은 고립될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친미주의를 일관해야 한다는 건 곧, 자국의 군대를 서방의 입맛에 맞는 군대로 재편해야 한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개발이 시작된 총이 바로 CETME Model B다. 헤클러 운트 코흐 G3의 원형이 되는 바로 그 총이다. 하지만 정작 스페인 군에서는 G3보다 먼저 개발이 시작되었지만 제식 채용은 상당히 더디게 이루어진다. 이유는 스페인의 열악한 경제 사정에 있었다. 스페인은 서방친화적인 총기의 빠른 도입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경제가 파탄이 난 상태에서 이걸 추진하기 어려웠다.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친독주의를 일관했던 전적, 2차대전 종결 직후 수 많은 독일 전범들의 신분세탁을 도운 점, 민간인들에 대한 만행이 끊이질 않았던 점 등이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기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대외 원조를 모색하고 좀 더 나아진 국가의 이미지를 선전하기 위해 정치 탄압의 수위를 낮추자마자 바스크인들이나 까딸루냐 사람들, 그리고 공화주의자들에 의한 준군사적 수준의 반항이 다시금 위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점도 신형 총기 도입의 필요성으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나라의 곳간은 빈 상태.
그래서 탄생한 총이 바로 오늘 소개할 FR8 소총이다. 정식 명칭은 Fusil Reformado. "리폼을 거친 소총"이란 뜻이다. '부분 현대화' 소총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이 소총은 1950년대 초중반에 개조가 이루어진 이후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소총으로, 신형 소총(CETME Model B)의 생산 및 채용을 서두르는 한편, 빠르게 자군의 군대를 좀 더 서방친화적인 무기 체계로 전환하기 위해 개발된 총이다.
FR8은 전형적인 볼트 액션 소총이고, 세부적인 부분을 들여다보자면 스페인이 내전 발발 이전부터 운용해왔던 마우저 M1893 소총과, Kar98k의 스페인 생산 버전에 해당하는 M1943 단소총을 짬뽕한 볼트액션 소총에, CETME Model B의 총열과 소염기, 가늠쇠를 결합한 요상망칙한 물건이다.
탄환은 기존의 7.92mm Mauser에서 7.62x51mm NATO 탄을 사용했지만, 기본 베이스가 마우저 소총이다보니 총 장탄 수는 5발에 불과했다. 클립을 사용하여 총기 내부로 탄을 밀어넣는 방식도 기존 마우저 소총들과 동일하고, 노리쇠뭉치의 형태 및 크기, 작동 방식은 98k와 완벽하게 호환이 될 정도로 유사하지만 장전손잡이는 M1893 소총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HK G3 및 CETME Model B와 동일한 총열과 소염기, 가늠쇠가 특징이고, 특히 총열 하단부에 있는 튜브 덕분에 얼핏 보면 '가스 피스톤 방식 소총인가?' 하다가 볼트 액션이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상당한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는데 이 튜브는 총검 꽂이다. 내부는 그냥 텅텅 비어 있는 튜브일 뿐이고 당연히 총겅을 탈부착하는 것 외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스페인은 자국이 보유하고 있던 마우저 계열 볼트액션 소총의 상당수를 이렇게 개조했다. 다만 이 총은 등장한 시절부터 1선급으로 운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데, 누가 봐도 시대를 역행하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자동 소총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반자동도 아니고 무려 볼트 액션 제식 소총이라니. 결국 상당수의 FR8은 등장과 거의 동시에 2선급으로 운용되거나 경찰용, 그리고 훈련병들의 제식 훈련을 위한 총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도 5발을 모두 삽탄하고 총검을 꽂은 상태에서도 무게가 3.6kg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은 나름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했고, 특히 2000년대 들어 G36을 채용하면서 AG36을 함께 도입, 운용하기 전까지 이렇다 할 유탄발사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스페인군에서는 "총류탄 발사기 대용품"으로 꽤 사랑받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가벼운 무게는 오히려 7.62x51mm NATO 탄을 사격할 시에 사수가 필요 이상의 반동을 느끼게 해주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해서, 일선 병사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등장과 함께 '미운 오리 새끼' 격이 되어버린 FR8은 그러나 여전히 생산 및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총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민주화 이후 이 총을 미국의 Ruger사가 수입하여 Ruger FR8 Hunting Scout이라는 명칭으로 민수시장에 판매하기 시작하는데, 가격이 저렴한데다 기본 메카니즘이 마우저 98계열 소총들과 동일하기 때문에 부품 수급도 쉬운 편이었고 적당히 클래시컬하면서도 적당히 모던한 형태가 나름 틈새시장 유저들에게 각광을 받게 된거다. 최근에는 폴리머 스톡이나 피카티니 레일, M-LOK 슬롯이 장착된 현대화 개조 킷들도 나올 정도로, FR8은 비록 군용 소총으로는 성공작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민수시장에서만큼은 그럭저럭 중박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상, 플래툰 매거진 김찬우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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