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영국은 SUIT라는 4배율 조준경을 지급합니다.
이 조준경은 여러 면에서 획기적이었습니다. 특정 인원이 아닌 보병 대부분에게 폭넓게 지급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당시로서는 매우 선명하면서도 내구성 높은 옵틱으로 만들어진데다 3중수소(트리튬)을 사용해 좀 어두운 곳에서도 조준이 가능한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이름인 SUIT자체가 Sight Unit, Infantry, Trilux. 즉 3중수소 조명 탑재 보병용 조준경)
여러가지 면에서 현대의 보병용 옵틱 개념의 선구자격인 물건인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영국스러운' 물건이라는거죠. 보기에는 뭔가 있어보이고 스펙도 좋은데 실제로 써보면 영 신통찮은 그런거요. 이것도 개념은 선구자고 핵심인 조준경 자체는 우수한데 정작 실용성이 그야말로 '영국맛' 이었던겁니다.
그죠 영국은 씹는맛이죠
뭐가 문제냐... "조준경 본체와 개념을 제외한 모든 것" 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조준경을 총에 장착하는 마운트. 여기서 제대로 삐끗합니다.
이 부분은 약간 억울한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원래 FAL계열 총기 자체가 '영점이 어긋나지 않게 총에 조준경을 계속 장착할 수 있게' 만든 물건이 아니거든요. 상부 커버에 조준경이 장착되는데, 청소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커버를 총에서 빼는 경우가 보통인데다 커버 자체가 조준경의 영점을 계속 유지할 정도로 견고한게 아니거든요.
(2000년대에 와서야 총에 계속 부착할 수 있고 영점도 유지되는 피카티니 레일이 나온...)
그런데, 리시버 커버에 장착한다는 사실은 차라리 사소한 문제에 불과합니다.
사실 다른 나라의 FAL들도 리시버 커버를 교체해 조준경을 장착합니다. 하지만 SUIT는 그냥 전용 리시버 커버에 조준경을 완전히 고정해놓은 상태(아래의 FN오리지널 스코프 참조) 가 아닙니다. 레버 조작만으로 리시버 커버의 마운트에서 또 쉽게 분리할 수 있는 탈착형이죠.
이론적으로는 이게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장착용 전용 리시버 커버는 그대로 총에 계속 장착해두고, 필요하면 스코프만 떼어서 청소를 하거나 정비를 하면 되는겁니다. 야전에서 스코프가 망가지면 잽싸게 떼어내서 기계식 조준기(아이언사이트)로 조준해도 되고.
그러나. 모든 영국맛이 그렇듯 "이론은 창대하나 실행은 졸렬" 했습니다.
레버를 이용하는 SUIT의 장착 시스템은 외부의 충격이나 반동으로부터 영점을 잘 지탱해주는 물건이 아닙니다. 실제로 스위스에 거주하는 한 영국인 건튜버(Bloke on the Range)는 핀란드에서 개최되는 사격대회에 자기 L1A1과 이 스코프를 함께 가져가려던 계획을 포기합니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과연 이 스코프가 여행 과정에서 영점을 제대로 유지할지 확신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죠. 현지에서 다시 영점잡을 시간도 없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못한다는 것.
아니 군용 스코프가 무슨 야전에서 구르는 것도 아니고 일반 여행 과정에서 영점이 틀어지는걸 걱정해야 한답니까...
게다가 스코프의 레티클도 문제. 끝이 뾰죽한 기둥 형태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게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 둔 이유는 '아래에 있으면 표적을 가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매우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비슷한 다른 스코프들이 레티클을 아래에 둔게 다 이유가 있다는.
그러면 이게 얼마나 실전에서 쓸만하냐. 실전 데이터는 없지만, 미국의 건튜브 채널 9hole Review에서 L1A1에 이걸 장착해서 이 채널 특유의 500야드 사격을 한번 해 봤습니다.
그 사격 결과가... 와 이거 정말 또 영국맛...
500야드까지의 전형적인 이 채널 코스에서 L1A1+SUIT의 조합은 총 소모 탄수 27발. 그런데 그보다 먼저 같은 코스를 *맨. 눈.* 으로 쐈을 때는 25발로 클리어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된 조준경이 달았더니 명중률이 떨어진답니까... 심지어 사수 본인의 컨디션이나 사격장 컨디션, 총기 상태등 제반 조건이 딱히 SUIT때 더 열악한 것도 아니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결국 영국군에서도 이 스코프는 별로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원래 DMR개념으로 만든 스코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목격되는 빈도가 거의 DMR급인 이유가 다 있는거죠. DMR처럼 지급되고 운용된게 아니라, 사용이 기피되다 보니 빈도가 낮아진겁니다. 달고 쓰는 친구들도 '저격' 개념보다는 '총에 달고 멀리 보는 목적'이 더 크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참고로 SUIT스코프는 우리 군에서도 '트라이락스'라는 이름으로 대략 70년대 끄트머리~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까지 사용됐습니다. 우리 군에서 이거 써 본 분들이 많지는 않은데, 사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 군에 이런게 있었다는 사실도 모를겁니다. 지급된 부대도 한정적이고 사용한 인원도 적어서 말이죠.
그래도 1970~80년대 사이에는 "조준경 자체만 따지면" 괜찮은 물건이어서 이스라엘도 적잖은 숫자를 사서 썼다는데, 이스라엘은 이걸 M16A1의 운반손잡이 위에 새로운 마운트를 만들어 고정했다고 하죠. 이게 영국 오리지널보다는 괜찮았다고 합니다.
구 소련도 이걸 카피해서 1P29라는 이름으로 최근까지 사용했는데(아마 지금도 쓰는 경우가 있을 듯?), 오리지널과 비교해서 마운트 자체는 더 개선된 셈이라고 하네요.
하여간 전형적인 '영국맛' 조준경인 SUIT(L2A2). 그래도 조준경 본체는 좋다보니 영국이 SA80을 채택할 때 이걸 개량한 SUSAT조준경(이건 레티클도 제대로...)을 사용했지만, 결국 그 어떤 기준으로 봐도 SUIT나 SUSAT보다 우수한 트리지콘 ACOG이 나오자 영국도 영국맛 포기하고 그 쪽으로 바꿔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