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압송된 포로들의 운명은…
솔직히 말해서 평균적으로 아주 좋았다. 42만명이 넘는 포로들이 미국의 약 700개에 달하는 수용소에 배치되었고, 이들은 그 뒤 매우 후한 대접을 받았다. 식사는 양호해 대부분의 포로들은 체중이 불었고, 사망률은 매우 낮았으며 그나마도 거의 대부분은 포로들간의 폭력행위(대부분은 골수 나치 포로들이 조직화되어 “배신자”를 색출해 살해한 경우)였다. 노동에 동원되기는 했으나 노동 조건은 포로 치고는 전혀 가혹하지 않았고, 심지어 적은 돈이지만 급료까지 지불되었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포로들은 탈출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니 단 2년에 체중이 많게는 20kg까지도 불어나는 흐뭇한 환경을 왜 알아서 벗어나?
그러나 제네바 협약에 조차 탈출은 포로의 권리이자 의무로 규정되어있고, 이를 떠나 군인으로서의 의무감등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경우는 결코 없지 않았다. 무시 못할 숫자의 독일군 포로들은 탈출을 시도했고, 꽤 많은 숫자가 의외로 첫 단추를 끼우는데 성공했다. 약 2,200명 정도의 포로들이 수용소를 무사히 벗어나는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용소를 빠져나가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실 그게 가장 쉬운 부분이었다. 사실상 모든 수용소가 물자와 인력 부족으로 보안 태세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많은 업무가 포로 자율에 맡겨졌다. 사실 포로들이 탈출을 원한다면 많은 수용소에서 대규모 탈출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면 어디로?
거의 모든 수용소가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외딴’은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땅이 얼마나 거대한지 감을 못 잡은 독일 포로들은 거의 전원이 며칠, 길어야 몇주 이내에 도로 붙잡혔다.
1944년에 애리조나주 파파고 수용소에서 벌어진 대규모 탈주사건도 비슷한 경우였다. 12월 23일, 여기서 25명의 독일 포로들이 탈출했다.
탈출한 포로들은 대부분이 U보트 승무원들이었다. 이들, 특히 1942년 9월에 격침된 U-162의 함장 유르겐 바텐베르크는 이 수용소에 도착한 직후부터 탈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그가 파파고 수용소에 이감된 것도 열렬 나치 추종자인 그를 다른 수용소들이 밀어내고 또 밀어낸 끝에 이뤄진 것이었다.
이들은 오래지 않아 수용소의 허점들을 발견했다. 3,000명이 넘는 포로를 370명 정도의 간수들이 지켜야 하는 이 곳에 허점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게다가 미군 간수들은 포로들에게도 관대했다. 심지어 바텐베르크가 배구장과 정원을 가꾸겠다며 삽과 곡괭이 등의 도구를 요청하자 혼쾌히 빌려주기까지 했다.
물론 이 도구들로 그들은 땅굴을 팠다. 비록 애리조나의 단단한 지반으로 인해 공사는 힘들었지만 제대로 된 삽과 곡괭이등의 도구를 갖춘 이들은 3개월만에 54미터의 터널을 파고 야반도주에 성공했다.
그러나 수용소를 벗어나는 것은 정말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들은 오래지 않아 뼈저리게 깨달았다. 수용소의 보안이 왜 허술한지, 미군이 포로 감시에 왜 그렇게 방심했는지 뼈속까지 사무치게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주의 면적은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전체에 경상남북도와 강원도와 경기도를 합친 정도로 넓다. 이 넓은 땅에 1944년 당시의 인구는 겨우 61만. 심지어 대부분의 면적이 사막이다. 유일한 희망은 멕시코 국경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멕시코 국경까지도 수백km를 걸어야 했다.
(한줄 요약: "니들이 도망가 봤자")
자연스럽게 며칠 안되어 붙잡히는 포로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대부분은 자수했다. 이대로는 굶어 죽겠다는 공포가 자연스럽게 엄습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근성있는 친구들 몇은 멕시코 국경 주변에서 붙잡혔고, 1월 8일에는 국경에서 겨우 16km 떨어진 마을에서 한 명이 붙잡혔다.
유일한 예외는 바텐베르크 함장과 부하 두 명이었다. 이들은 1월 22일까지 들키지 않았는데, 이들의 비결은 간단했다- 왜 멀리 도망가?
이들이 미국 밖으로 나가기 위해 멕시코 국경까지 가려면 수백 km를 걸어야 했지만, 바텐베르크는 그러는 대신 수용소 인근 산 속 동굴에 부하들과 함께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며칠에 한번씩 수용소 밖으로 일하러 나갔다 들어가는 포로들에 섞여 수용소로 돌아가(!) 식량등을 모으고는 다시 나와 동굴로 돌아갔다. 그가 수용소 안에서 들켜 붙잡힌건 거의 한달 가까이 지난 1월 22일(그때까지 미군은 그가 들락날락하는걸 몰랐다는). 결국 1월 28일까지 나머지 두 명도 차례로 붙잡혔는데, 마지막 붙잡힌 친구는 인근 피닉스 시내로 기어나와 가지고 있던 돈 전부를 털어 식당에서 끼니를 때운 뒤 시내를 배회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붙잡힌 뒤 가혹한 처벌을 예상했다. 아마 처형까지 각오한 사람은 없었겠지만, 독일 기준으로 탈주 포로라면 분명 혹독한 처벌을 받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벌은 탈주한 기간 만큼 식사로 빵과 물만 배급받는 것이었고, 그 외에 이렇다 할 처벌은 없었다. 간수들도 심각한 벌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2차 대전 기간중 미국 내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포로 탈주극은 비교적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