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 싸워!
시그, 싸워!

 

총 좋아하는 분들 사이에 어떻게 보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처럼 존재하는 것이 있다.

“시그 사우어는 어느나라 브랜드인가요?”

답은… “여러 나라요”.

시그 사우어는 현재 존재하는 총기 회사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역사와 구조가 복잡한 브랜드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역사와 현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야기의 출발은 스위스다. 스위스의 SIG(Schweizerische Industrie-Gesellschaft, 영어로는 Swiss Industrial Group… 야 영어로도 독어로도 다 SIG네 엄청 편리하네. 번역하면 ‘스위스 산업 그룹’정도?)라는 업체는 19세기 후반부터 스위스를 대표하는 총기업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주 업종은 철도차량 생산등의 다른 분야였고 총기는 이 회사의 사업분야 중 하나였지만 하여간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그런데 이 SIG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스위스의 수출 법률이 총을 수출하기 점점 까다로워졌다는 것이다. 특히 1970년대 중반에 신제품인 P220을 만든 다음 이걸 해외에 적극적으로 수출하고 싶던 SIG에게 스위스 법의 규제는 골칫거리였다.

P220. (Wikipedia)
P220. (Wikipedia)

 

늘 하는 이야기지만,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 대책이 있다”. SIG도 스위스의 정책에 대책을 내놨다. 해외 파트너 확보였다.

독일에 자우어 운트 존 Sauer & Sohn이라는 회사가 있다. 1751년에 창업한 유서깊은 업체로 주 종목은 사냥이나 사격용 라이플이었지만 20세기에는 자동권총도 좀 만들었다. 원래 동독에 있던 업체지만 독일 분단 후 서독에서 재출발했는데, 하여간 역시나 여기서 중요한건 그 역사가 아니고 SIG와의 관계다.

SIG는 1975년부터 독일 시장에 자우어 운트 존을 통해 P220을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1976년에는 자우어 운트 존을 그냥 합병해 버린 뒤 “SIG자우어(Sig Sauer: 독일식으로 읽으면 지크-자우어?)”라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다. 스위스에서 총 만들어 수출하기가 뭐같으니 독일(당시에는 서독)에 아예 새로운 법인을 차려놓고 해외에 수출할 총은 거기다 공장을 짓고 만들어 팔기로 한 것이다.

SIG는 Sauer & Sohn과 손을 잡고 SIG Sauer를 만들었습니다
SIG는 Sauer & Sohn과 손을 잡고 SIG Sauer를 만들었습니다

 

즉 본사는 스위스에 있는 SIG고, 독일에 있는 SIG자우어는 자회사 겸 해외 수출공장이라고 보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 전략은 1990년대까지 아주 잘 먹혔다. 1980년대에 P226시리즈가 미국에서 대박이 터지면서 사세는 급속히 성장했다. 그런 가운데 1985년에 시그암스(SIGARMS)가 미국에 창설된다. 간단하게 말해, 수출이 아주 잘 되니 대리점 끼고 미국에 팔지 말고 직접 현지 법인을 만들어 팔기로 한 것이고 그게 시그암스가 된 것이다.

2000년까지 이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본사는 스위스에 있고, 독일에는 SIG자우어, 미국에는 시그암스라는 지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시그암스는 90년대 초반에 미국 현지에서 P229를 생산하는 등 미국 현지 생산도 조금씩 시작하지만, 생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독일의 SIG자우어였다.

이 관계가 요동친 것이 2000년이다. 본사였던 SIG의 총기 부문은 원래 스위스군의 대규모 소총 발주를 먹고 사는 곳이었다. 스위스는 작은 나라임에도 냉전시대 60만의 대군을 유지했다. 이들의 절대다수가 예비군이라고 하지만, 이들 전원에게 소총이 지급됐고 거기에 더해 전시 소모 보충용의 총기까지 추가로 생산해야 했다. 즉 SIG가 오랫동안 상당한 규모의 총기 생산라인을 유지할 ‘떡밥’이 있었던 것이다.

StG90을 들고 있는 스위스군. 이걸 SIG가 만들지 못하게 되면서 브랜드가 무너지고 회사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응?)
StG90을 들고 있는 스위스군. 이걸 SIG가 만들지 못하게 되면서 브랜드가 무너지고 회사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응?)

 

문제는 냉전이 끝나면서 스위스군이 대규모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고, 자연스레 소총 생산도 축소할 수 밖에 없게 됐다는 것. 스위스군은 현재 13만을 좀 넘는 수준까지 축소되어 있다. 이렇게 되자 SIG는 총기 부문을 포기하게 됐고, 2000년에는 총기 사업부문 및 그와 관련된 모든 자회사를 독일의 투자회사인 L&O 홀딩스에 넘겨버렸다- 여기에는 SIG자우어 브랜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스위스쪽의 구 SIG공장은 ‘스위스 암스’로 이름을 바꿨지만 나머지는 원래의 이름과 사업 형태를 대체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7년에 미국 시그암스가 이름을 “SIG Sauer”로 바꾸면서 대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대로면 SIG의 미국 지사이던 이 곳이 L&O홀딩스에 의해 새로 출발한 ‘시그 사우어 그룹’의 실질적 본사로 바뀐 것이다. 경영의 중심으로 바뀐 것은 물론이고, 미국내 공장을 대대적으로 확대해 생산의 중심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SIG가 총을 과감히 버리고 집중하기로 한 것이 포장재 및 관련 설비. 우리나라에도 SIG마킹이 찍힌 음료수 팩이 드물지 않게 보이니 편의점에서 한번 살펴보시길.
SIG가 총을 과감히 버리고 집중하기로 한 것이 포장재 및 관련 설비. 우리나라에도 SIG마킹이 찍힌 음료수 팩이 드물지 않게 보이니 편의점에서 한번 살펴보시길.

 

어차피 본사가 스위스 회사가 아니게 된 이상 굳이 유럽에 본거지를 둘 이유는 없었다. 가장 총이 많이 팔리는 곳은 미국이었고, 생산 단가도 유럽보다 미국이 저렴했다. 무엇보다 원래 생산 거점이던 독일은 법이 점점 엄해지면서 군용도 민수용도 수출이 더 까다로워졌다. 미국으로 본거지를 옮기는게 타당해진 것이다.

그 결과 2004년에만 해도 130명의 직원이 있던 시그암스는 시그 사우어(이건 미국이나 영어식으로 읽자)로 이름이 바뀌면서 2016년 무렵에는 직원이 1천명을 넘고 연 생산량도 43,000정이 넘었다. 원래 생산 거점이던 독일의 SIG자우어 공장은 유럽 시장용 제품 혹은 부품 생산 거점으로 축소됐다. 독일 SIG자우어의 몰락은 점점 가속화돼서, 2020년에는 결국 독일의 SIG자우어 공장이 문을 닫았다(원래의 자우어 운트 존은 L&O홀딩스 아래에서 독자 브랜드로 영업과 생산 계속).

미군 납품은 이제 내 천하다 ㅋㅋㅋㅋㅋㅋ .... 하고 SIG사우어가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M17. (Wikipedia)
미군 납품은 이제 내 천하다 ㅋㅋㅋㅋㅋㅋ .... 하고 SIG사우어가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M17. (Wikipedia)

 

즉 원래의 ‘지크 자우어’는 스위스 돈으로 움직이고 본사를 스위스에 둔 다국적 기업이었다면, 오늘날의 ‘시그 사우어’는 독일 돈으로 움직이고 본사가 미국에 있는 다국적 기업이다. 그렇다면 이 회사는 독일 회사일까? 아니면 미국 회사일까?

정답 찾기는 어렵다. 소유권을 가진 L&O홀딩스는 독일 회사이니 그걸로만 따지면 독일 회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본사는 미국에 있고 생산도 미국에서 이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케팅이나 제품 성격도 과거와는 비교도 안되게 미국화되어있다(안타깝게도 평균적인 품질까지 미국화된 느낌이지만). 홍보도 ‘미국 회사’임을 아주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기업의 국적에 대한 개념이 예전보다 모호해진 21세기 기업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는 한데, 하여간 현재의 ‘시그 사우어’는 2000년까지 우리가 알던 ‘지크 자우어’와는 너무나 다른 회사라 할 수 있다. 

어쨌든 현재 이 회사는 ‘독일 회사일 수도 있고 미국 회사일 수도 있는’, 슈뢰딩거의 회사라 할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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