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2월 7일,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 페테르부르) 인근 푸시킨 비행장에서 소련 해군이 VIP수송용으로 운용하던 한 대의 Tu-104 여객기가 이륙했다. 하지만 이륙 8초 뒤. 갑자기 비행기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방향을 틀더니 그대로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순식간에 49명이 즉사했고, 사고 순간 조종석 밖으로 떨어져 나간 조종사도 결국 병원으로 가는 길에 숨졌다.
하지만 이 사건이 준 충격은 단순히 큰 사고여서만이 아니었다. 회의 참석차 레닌그라드를 방문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가는 길이던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의 수뇌부가 거의 전멸했기 때문이다. 태평양 함대 총사령관인 에밀 스피리도노프 제독과 부인을 비롯, 제독만 해도 1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2차 세계대전 전 기간에 걸쳐 사망한 소련 해군 제독이 4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 몇초 사이에 16명의 제독이 숨진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소련의 첫 반응은 “적이다!” 이런 엄청난 일은 분명 태평양 지역에서 해상 도발이나 전쟁을 벌이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짓이 틀림없다! 즉각 태평양 함대에 전투 준비 명령이 하달됐고, 소련 당국은 적대국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편 현장에서 범행 증거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 도발’의 가능성은 점점 배제됐다.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이고도 주변국의 반응은 이상이 없었고,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뭔가 해상도발같은걸 할 낌새도 없었다. 그러면 적은 내부에 있겠군! 내부의 적을 찾자! 소련 당국은 이번에는 내부자들의 방해공작을 의심했고, 특히 사령관이 사망하면 자동으로 사령관직을 계승할 부사령관에게 의혹이 향했다. 부사령관은 심지어 그 비행기에 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사하면 할수록 그와 사건의 연관은 없었고, 그 외에 사령관의 사망으로 덕을 볼 제독들은 모조리 사령관과 저승길 동무가 된 판이었다.
결국 조사 끝에 누군가의 방해공작이 아니라는 사실만 분명해졌고, 조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한심한 진상이 드러났다.
사실 Tu-104라는 기종 자체부터 불안하기는 했다. 1958년부터 81년 사이에 16대가 추락해 1,140명이 사망했다. 물론 50년대에 개발된 초기 제트 여객기들의 사고율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한 축에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는 기체 결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사 결과, 일단 모든 ‘승객’들이 온갖 짐을 다 실었고 그것 때문에 과적 상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의 소련은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상태였고, 특히 태평양 함대가 있던 극동지방은 정도가 심했다. 이런 곳에 있던 사람들이 소련 제2의 수도라고까지 불리던 대도시 레닌그라드를 방문했으니, 온갖 것들을 사재기해서 싣고 오려고 했을 것이 뻔하다. 조종사가 이럴 때마다 매번 항의했지만 그 때마다 계급으로 묵살당한 것도 조사결과 드러났다.
하지만 결정타를 날린 것은 종이였다. 하나에 500kg짜리 인쇄용지 두 묶음이 실린 것이다.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자체 신문 인쇄를 위해 구입한 것인데, 이걸 비용 절감을 한답시고 별도 수송편을 편성하지 않고 귀빈 수송기에 같이 싣고 가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이 종이의 무게도 무게지만 화물칸에 제대로 묶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이륙중 갑자기 화물칸 뒤로 굴러가면서 무게중심이 조종사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뒤로 쏠려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고 진상이 드러나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일 벌인 당사자들이 모조리 저승길 동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사고의 진상은 소련답게 오랫동안 비밀 취급되다 소련 붕괴 후에야 알려졌다. 그리고 이 사고로 얻어진 교훈은 별로 없는것 같다. 1990년대 중반에도 러시아군 장군 하나가 수송기(An-12) 한 대에 규정을 무시한 과적을 강요했다 이륙 후 추락시킨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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